2026년7월5일 古代日本을 建設한 산업집단은 韓民族 하타(秦)家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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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장시 작성일26-07-05 16:48 조회38회 댓글0건본문
2026년7월5일古代日本을建設한 산업집단은韓民族하타(秦)家門이다
“초목이 무성한 가도노군(葛野郡)의 부유한 마을을 바라보니 나라의 번영이 느껴지누나.”古代 日本이 부족시대를 벗어나기 시작한4세기 전후15대 오진천황(應神天皇)이 지금의 교토(京都)市북쪽에 있는 농촌마을을 보고 한 말로 전해지고 있다.당시京都북부 일대는日本으로 건너간新羅系 韓民族인 하타(秦)씨족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이 사실은古代日本을 지배한 상류계층의 계보를 집대성한新撰姓氏錄(新撰姓氏錄)의 오진(應神)청황기14년 편에 실려있다.하타(秦)씨족은古代日本의 산업계를 이끈 최대 가문이었다.이로부터50여년후 하타(秦)가문은 인구가1만8천여명에 이른 대집단으로 불어났으며 야마토(大和)정권을 지원하는 강력한 위치에 올랐다.양잠을 비롯한 광산개발과 치수,관개,토목 그리고 양조 등 넓은 분야에 걸쳐 산업활동을 주도한 하타(秦)씨족은現 京都의北區,中京區,下京區,南區,右京區,그리고西京區등에 걸친 넓은 지역에 분산거주했으며右京區의 우즈마사(太秦)를 본거지로 삼아 오사카(大阪)와 나라(奈良)등 긴끼(近畿)와 관동지방 외에 남쪽의九州와四國등지로까지 정착 범위를 넓혀갔다.

(四天王寺)
秦씨족의日本移住시기에 대해日本역사학계는4세기 말에서5세기 전반쯤으로 보고 있다.秦가문은 헤이안교(平安京,現 京都)가日本의 도읍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 정착,하천제방구축과 농경지 확장 및 양잠,광산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개발사업을 주도했다.당시日本은 하천제방건설이나 보(洑)의 구축,저수지 개발 및 사찰 등 대형건물의 건축기술이 없어 이런 분야는 상당 부분秦가문이 주도했다.日本최초의 저수지인 오사카 인근의 한인지(韓人池)는4세기말應神천황 때伽倻,高句麗,百濟,新羅人들이 합동으로 만든 것이고,日本最初의 대형사찰인 오사카(大阪)의四天王寺는百濟人유중광(柳重光)이578년에 세운 것이며,河川제방은新羅人 秦씨족이 만든京都의 가쓰라강(桂川)제방이 최초의 공사로 기록돼있다.秦가문은794년50대 간무천황(桓武天皇)이 도읍을奈良에서京都로 옮길 때 방대한 규모의 자금을 지원하고 공사를 시행한 공적을 인정받아 당시 야마토(大和)조정으로 부터 특별대우를 받는 호족반열에 올랐다.간무천황은百濟王室의 혈통을 이어받은 천황이다.生母인 다카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百濟25대 무령왕(武寧王)의 손녀이며日本으로 건너간 무령왕의 제2왕자인 순타(純陀)太子의 딸이다.헤이안(平安)시대 후기인12세기 후반부터‘京都’로 개칭한 헤이안교(平安京)는1868년明治維新때까지 천여년간日本의首都로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古代의京都는新羅系의秦가문과百濟王族아직기(阿直岐)의 후손,그리고高句麗系의 야자카(八坂)가문 등韓半島에서 건너간韓民族들이 당시 상류층의 위치에서 번영을 누린 가문이다.高句麗渡來人인 야자카씨족과 정이대장군을 지낸百濟系인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의 가문은京都의 동쪽인 지금의 기온(祗園)일대에,그리고秦씨족은 서북부의 우즈마사(太秦)지역을 본거지로 삼았다.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1917~83)東京大學교수는 그의‘日本歷史(日本역사)’에서“4세기 이후古代에 야자카 동쪽은高句麗渡來人과百濟人들이,그리고 서북쪽은秦가문이 각각京都를 지배했다”고 전하고 있다.또한新撰姓氏錄은“古代 京都에本貫을 둔渡來人씨족은百濟系의60개 가문을 비롯하여高句麗系24개,新羅系4개,그리고伽倻系의3개 등韓民族系가문이 무려91개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있다.이는韓民族 渡來人들이古代日本의 정치와 경제분야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다.

新撰姓氏錄은神別,皇別,諸蕃등 세 부류의姓氏1,182개의 지배층 가문만 수록한 책이다.이중 신별은 황실직계로 천황 자리를 이어가는 혈통이며,황별은 천황이 되지 못한 황실직계 후손과 귀족,그리고 제번은韓半島에서日本으로 건너간百濟王室의 후손인百濟氏(百濟氏)를 비롯하여王仁과 아직기의 후손인 아야씨(漢氏),그리고新羅系의 하타씨(秦氏)등을 말한다.新撰姓氏錄을 비롯한日本書記나古事記,續日本記등古代歷史書는 물론日本의 많은歷史學者들이 특히秦씨족에 관해 다량의 연구문헌을 내놓고 있다.新撰姓氏錄은“日本의 많은渡來人氏族가운데서 특히 하타(秦)씨족에 대해서만92부18,670명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를摘示하고 있다.歷史學者인 가토 겐기치(加藤謙吉)日本中央大學교수도 하타 씨족의 거주지역이 당시34국(國) 89군(郡)으로 넓게 분포돼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秦씨족의 뿌리에 관해日本 歷史學者들 사이에中國 秦始皇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었으나 지금은韓民族渡來人說이 통설로 자리를 잡고 있다.秦씨족을 깊이 연구한歷史學者미즈다니 치아키(水谷千秋)교수는 그의‘謎の渡來人秦氏(수수께기의 도래인 하타씨)’에서“秦씨족의 고향은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이라고 주장하고있다.水谷千秋교수는三國史記의 지리지에 나오는 해곡현(海曲県)이現울진군 매화면 덕신리 일대이며 이곳의 옛 이름인‘파단(波旦)’이日本語로‘하타’로 바뀌었으며1988년 울진군에서 발견된新羅時代의 비석에도 이 지명이 올라있다”고 밝히고 있다.또한秦씨족이 기계직조를 주업으로 했으며 기계직조를日本語로‘하타오리(機織)’라고 부르는 것도 하타 에서 비롯 됐다고 보고 있다.또한古代한일관계의 권위자인 교토대학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교수와 언어학자인 가나 쇼사부로(金澤庄三郞)는‘하타’는 한국어의‘바다’에서 변화된 말이며 하타 씨족이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기 때문에 하타 라고 부르게 됐으며 이밖에 한국에서 직기로 사용한 베틀을古代어로‘파타’라고 했는데 이 말이 하타로 변화 됐다는 설도 있다.
日本이 부족 형태에서 어느 정도 나라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4세기 말에서 야마토(大和)정권이 수립된6세기 말 사이에日本으로 이주한 한민족은 본래 성이 없었거나 있어도日本에서 그 성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다.와세다대학의 가토 겐기치(加藤謙吉)교수는 그의‘秦氏とその民,渡來氏族の實像(하타씨 사람들 과 도래씨족의 실상)’에서“5세기 후반부터7세기 후반에 걸쳐日本으로 건너 온 하다 씨족을 비롯한 이주민들이 야마토정권의 국가건설에 이바지한 역할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유력한 도래인들은 야마토정권에 참여하여 왕권에 봉사 함으로써 그 공로가 인정되어 독립된 성(姓)을 받았다.新撰姓氏錄은日本하타가문의 시조로 알려진“하타 사케노기미가 천황의 신임을 받아 황실의 공물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오쿠라(大?)의 장관이 됐으며 하타 씨족은 단순한 사유민(私有民)이 아니라 나라의 중요한 직무를 담당하는 국가지민(國家之民)위치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오쿠라의 관리자는 황실 유지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의 열쇠를 가지고 출납을 관장하는 재무담당 직책을 맡았다. 7세기 후반日本이 법에 의한 중앙집권적 국가조직을 갖추기 위해 율령국가제도를 확립 하면서 업무성격에 맞추어8개의 정부기관을 설치했다.당시 국가재정 담당기관으로 발족한 오쿠라쇼(大?省)라는 관청은 그 후1300년 넘게 이어오다2001년 재무성으로 개칭됐다.이 오쿠라쇼는 하타 씨족의 하타 사케기미가 장관으로 있었던 오쿠라(大?)가 그 기원이다.

(京都 廣隆寺)
하타 가문은 주로 산업활동에 전념하여 古代日本에 크게 기여했지만 6세기 후반부터 활약한 하타 가와가쓰(秦河勝)만 예외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이름은 고사기와 日本서기를 비롯하여 新撰姓氏錄 등 대부분의 古代日本역사서에 등장한다. 출생과 사망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출생지를 하타 씨족의 본거지인 현 교토인 가도노(葛野) 일대로 보고있다. 가와가쓰는 불교 수용문제를 둘러싸고 같은 新羅系인 소가(蘇我)가문과 日本 귀족인 모노노베(物部)가문 싸이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불교 수용을 주장하는 聖德太子와 소가가문을 도와 승리함으로써 聖德太子의 측근으로 발탁돼 정치와 군사 분야에서 막강한 실력을 행사했다. 지금도 교토시 우경구 서경구 일대에는 그의 후손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으며 그를 기리는 사찰과 그가 임종한 곳으로 전해진 자리에 가와가쓰종언비(河勝終焉碑)가 남아있다. 그의 후손중에는 壬辰倭亂때 왜군 장수로 참전한 四國지방 영주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를 비롯하여 춤과 노래가 혼합된 日本傳統藝能인 노가쿠(能樂)에서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간나미(観阿弥)와 제아미(世阿弥)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다. 수년전에 한 번 들렀던 하타가문의 본거지인 京都 우즈마사를 다시 찾았다. 처음 갔을 때는 일정관계로 자세히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하루를 내어 하타후손들이 남긴 흔적을 샅샅이 뒤졌다. 京都는 中國의 長安을 모방한 계획도시이기 때문에 지금도 市 중심지 도로는 바둑판처럼 곡선이 거의 없으나 골목길은 좁고 휘어진 길이어서 京都 사람만이 운전이 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고류지(広隆寺)는 하타씨족의 家門사찰이다. 京都市 우경구 우즈마사(太秦)에 위치한 広隆寺는 하타 가와가쓰(秦河勝)가 당시 日本의 실력자인 聖德太子로 부터 받은 新羅佛像을 안치하기 위해 603년에 創建한 사찰이다. 창건 당시 고류지는 위엄을 갖춘 7당의 대 가람 이었으나 1300여 년의 세월을 지난 지금은 일부 건물만 남아있다. 고류지는 건축 당시 보다 경내가 줄어들었다는 데도 엄청 넓다. 촬영은 본당 전경만 허용되었다. 반가사유상이 보존돼있는 영보전(靈寶殿)은 건물도 촬영 금지였다. 1922년에 지은 영보전에는 新羅가 기증한 半跏思惟像을 비롯하여 하타 가와가쓰의 부부 목좌상 등 20점의 국보와 48점의 佛像과 羅漢像 등이 가득하다



고류지는 영보전에 보존돼있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사찰이다. 한 그루의 적송(赤松)으로 제작된 日本國寶 조각부문1호인 이 半跏思惟像은 623년 新羅가 보내준 불상이다. 半跏思惟像은 오른손 약지를 뺨에 대고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하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파스는 고류지(広隆寺)의 미륵보살상을 감상한 후 “완성된 인간실존의 최고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있는 작품이다. 속박을 넘어 도달한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원만하며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다. 지금까지 이처럼 인간실존의 진실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 없다. 이 불상이야말로 인간이 지녀야 할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남김없이 표현한 표징이다”라고 극찬한 걸작이다. 고류지에서 멀지 않은 동쪽에 하타가문을 기리는 작은 신사가 있다. 하타가문이 역점을 두었던 양잠과 관련된 가이코노 야시로(蚕の社)다. 우리말로 옮기면 ‘누에신사’. 하타씨족은 본거지로 삼은 우즈마사 일대에서 양잠과 기계직조로 섬유산업을 진흥시켜 큰 번영을 누렸다. 그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신사가 바로 이 누에신사다. 하타씨족이 양잠을 日本에 소개한 역사를 전해주는 신사이다. 고노시마신사(木島神社)라고도 불리는 이 신사에는 지금도 연중 참배 객이 이어지고 있다. 우즈마사에는 사찰과 신사 외에 6-7세기에 조영 된 두 개의 하타가문 고분이 주택지 한 가운데에 남아있다. 그 중 하나가 작은 산 모양을 한 아마쓰카고분(天塚古墳)이고 다른 하나는 표토가 없어지고 거대한 석실만 남아있는 헤비쓰카고분(蛇塚古墳)이다.
고류지 일대에는 지금도 전차와 버스역이나 지역이름 등에 秦(하타) 또는 太秦(우즈마사) 라는 이름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우즈마사 일대는 마을 옆으로 흘러가는 가쓰라강(桂川)이 자주 범람했기 때문에 사람이 살기에 좋지 않았으나 하타씨족이 강을 개수하고 농지를 개간 함으로써 여건이 개선되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정착했다. 歷史學者인 하야시야 다쓰사부로(林屋辰三郞)씨는 “하다씨족은 가쓰라강에 제방을 구축하여 수량을 조절하고 습지를 개량했다. 그들은 日本에서 최초로 댐을 축조했으며 대규모 개간사업을 벌이고 양잠과 기계직조사업을 개척했다”고 전하고 있다. 古代日本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넓은 범위에 걸쳐 정착한 家門은 韓民族系의 하타씨족으로 밝혀졌다. 日本氏族制度 연구의 大家인 ‘오다 아키라’(太田亮)(1884~1956)교수가 1963년에 펴낸 ‘姓氏家系大辭典(성씨가계대사전)’은 하타씨족에 대해 “天下의 大姓으로 그 크기가 다른 성씨에 비할 바 아니며 후손의 파(派) 또한 적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古代史歷史學者인 오와 이와오(大和岩雄)(1928~2921)는 그의 ‘日本にあつた朝鮮王國(日本에 있었던 조선왕국)’에서 “하타가문은 한민족 도래인 씨족 가운데 최대 집단이다. 5세기 전후 처음으로 日本에 이주하기 시작해 韓半島 남부의 옛 伽倻와 新羅에서 100여년에 걸쳐 단속적으로 건너왔으며 日本에서 하타왕국을 이루었다”으며 日本의 문화, 신앙, 예능, 공예, 금속제련 등 광범위한 분야에 깊이 관여했다”고 전하고 있다. 專修大學의 가와가미 다카시(川上隆志)교수도 ‘渡來民と日本文化(도래민과 日本문화)’에서 “하타씨족은 日本의 문화, 경제, 종교, 기술, 정치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넓고 깊게 영향을 끼쳤다”고 밝히고 있다. 東京大學의 다케우치 리조(竹內理三)(1907~1997)를 비롯한 많은 歷史學者들도 하타씨족은 “식산적 씨족, 非貴族的, 非官僚的 체질을 가졌으며 저변이 넓은 호족이고 재력과 노동력을 제공하여 정치를 움직인 은연한 실력자인 동시 중앙정부에서 전면에 나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大和조정이나 율령국가의 기반을 받쳐 준 역할을 담당한 大氏族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松尾神社)

(伏見稻荷大社)

(賀茂神社)

(八坂神社)

(兵庫縣 大避神社)
서울의 동서남북에 4대문이 있듯이 京都에는 京都市를 보호하는 4大神社가 있다. 이 네 개의 神社가 모두 韓民族渡來人이 조상을 받들기 위해 세운 가문 신사로 시작된 것이다. 서쪽의 마쓰오대사(松尾大社)와 남쪽의 후시미 이나리대사(伏見稻荷大社), 그리고 북쪽의 가모신사(賀茂神社)가 新羅渡來人 하타 가문이 세웠고, 동쪽의 야자카신사(八坂神社)는 高句麗系의 야자카가문이 창건했다. 또한 UNESCO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야자카신사 북쪽의 기요미즈데라(淸水寺)는 百濟渡來人 후예인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가 開創한 명찰이다. 특히 하타씨족의 조상을 제신으로 받드는 神社는 京都는 물론 日本전역에 걸쳐 散在해 있다. 효고(兵庫)県의 아코시(赤穗市) 해변에 하타 후손 가운데 유일하게 大和조정에서 고관을 지낸 하타 가와가쓰(秦河勝)를 받드는 오사케신사(大避神社)가 있다. 가와가쓰를 오사케노 기미(大酒君)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오사케신사는 술 주(酒)자를 넣어 大酒神社로 표기하기도 한다. 또한 오사카 인근의 이케다(池田)시와 도쿄 서부 지금의 조후(調布)시 일대는 이곳에 정착한 하타씨족이 기계직조로 옷을 대량으로 생산했던 곳이다. 日本 오복(吳服)의 고향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케다시에는 하타가문신사인 오복신사와 이케다신사가 지금도 남아있다. 나라현 나라시 남쪽 다와라 모토(田原本)마을 일대에는 지금도 노가쿠(能樂)를 생업으로 했던 하타가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이곳에 정착한 노가쿠 예능인들은 하타 가와가쓰를 신으로 받들고 있다. 또한 시고쿠(四國)현 고치현 나가하마시에도 하타씨족의 가문신사인 하타신사가 있다. 8-9세기 나라시대와 헤이안시대 전기에 걸쳐 하타가문은 31개로 분파되어 모두 日本 성으로 바꾸었다.

◆【筆者註: 秦河勝의 祖인 秦氏는, 3世紀頃에 大陸으로부터 倭國으로 渡來한 氏族이며, 秦河勝는 飛鳥時代의 族長的人物로서 聖徳太子의 同志로서 活躍한 人物이다. 京都最古의 寺로 알려진 広隆寺를 建立, 聖徳太子로부터 하사받은 弥勒菩薩半跏思惟像(國宝)를 安置했다고 한다. 広隆寺近隣에는 大酒神社가 있으나,神佛分離政策에 따라서 広隆寺境內로부터 分散해서 遷座한것이라고 하며, 神社도 大避(大酒)라고 일컫는 緣由의 하나이다.】
하타씨족은 대규모의 양잠과 기계직조를 통해 日本人의 의류를 획기적으로 개량하고 농법개량으로 식량증산과 고품질 경질 도기(陶器)인 스에끼(須惠器)를 비롯한 필수 생활용기를 대량으로 보급했으며 염전을 일구어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 식문화개선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하타씨족이 기계직조를 통해 옷감을 대량으로 생산하기까지 日本사람들은 주로 초목을 원료로 만든 조잡한 의복을 만들어 입었다. 하타씨족의 이러한 생활 전반에 걸친 필수용품의 대량생산으로 日本人들의 삶의 수준이 크게 향상됐다. 이처럼 하타씨족이 선도한 수많은 산업활동으로 古代日本의 모습과 日本人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됐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土木과 治水분야에서 이룩한 실적은 古代日本을 한 단계 격상시킨 역사적 공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土木과 治水사업 중에서도 특히 京都市를 관통하는 가쓰라강(桂川)과 오사카의 요도강(淀川)치수공사가 그 대표적 예이다. 가쓰라강은 우기 때마다 범람하기 때문에 보통 골치거리가 아니었다. 당시 日本은 洪水를 막을 기술이 없었다. 이 문제를 하타씨족이 제방축조에 성공함으로써 말끔히 해결했다. 京都 西部 아라시산(嵐山) 쪽과 연결된 도게쓰교(渡月橋) 옆에 하타씨족이 구축한 일종의 보(洑)인 가도노오이(葛野大堰)가 훗날 손을 봤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가쓰라강 주변에는 지금도 하타가문과 관련된 神社와 寺刹 그리고 古墳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1002년에 발간된 헤이안(平安)時代의 법제서인 정사요략(政事要略)에 실린 하타씨본계장(秦氏本系帳)은 “ 가쓰라강 제방축조는 천하에 누구에게도 비길 데가 없는 大役事다. 이 공사는 하타씨족이 일족의 기술자를 총동원하여 이룩한 역사적 업적이며 古代日本 最大規模의 河川工事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가쓰라 제방공사의 완성으로 홍수조절은 물론, 京都인근 일대에 대규모 농경지가 탄생했다. 이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후반까지 수십년에 걸쳐 가쓰라강 제방은 여러번 개수됐으며 지금까지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역사서인 日本후기(日本後紀) 간무(桓武)천황18년 12월 편에도 “가쓰라강 제방축조공사 이전에는 강을 건너는데 여간 불편하지 않았으나 제방공사완료후 통행이 쉬워졌다”고 기록돼있다. 이 공사의 완공후 공사를 지휘한 하타가와가쓰를 칭송하는 노래까지 등장했다. 19세기 후반 日本이 首都를 東京으로 이전하기까지 천년동안 京都가 도읍이었던 것은 가쓰라제방이 홍수를 막아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千年동안 황궁(皇宮)이었던 교토어소(京都御所)의 천황집무장소인 시시덴(紫宸殿)은 본래 하타 가와가쓰의 저택이었던 건물을 개수한 것이다. 하타씨족이 남긴 유적은 당시 아이누인의 영토인 東北地方과 北海道를 제외한 日本 전역에 걸쳐 고르게 분포돼 있지만 본거지인 京都를 중심으로 大阪등 기나이(畿內)지역에 특히 집중적으로 분포돼있다. 하타씨족은 京都의 가쓰라강에 이어 관서지방의 주요 하천인 요도강(淀川)에도 제방을 쌓아 홍수조절이 가능해져 오늘날 大阪 일원에 광대한 경작지가 조성되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정착하게 되었다. 이 지방이 日本古代의 중심지로 발전한 기나이(畿內)지방이다. 요도강 제방축조 후 하타씨족이 정착한 곳이 現 大阪府 동북 쪽의 내야가와시(寢屋川市)이다. 이 일대에는 지금도 하타향(幡多鄕), 하타무라(秦村), 우즈마사(太秦) 등 하타 이름을 단 마을이 남아있다. 고사기(古事記)도 닌도쿠(仁德)천황 편에 “하타가문이 힘을 써 만다(茨田)제방제방을 쌓고 만다 일대에 사람이 살 수 있게 되자 마을이 생겨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다는 오사카부(府)의 옛 이름이다. 내야가와 시내에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에 걸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25기나 남아 古墳公園으로 지정돼 있으며 이 가운데 길이가 45m나 되는 韓半島式 大形圓形고분인 하타씨족의 우즈마사다카쓰카고분(太秦高塚古墳)이 특히 유명하다. 이밖에도 하타씨족이 이 일대에서 말을 많이 길렀던 日本 최초의 말 목장과 주거지 유적, 그리고 당시에 사용된 新羅 토기인 스에키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4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설쳐 日本으로 건너간 韓民族 가운데 古代日本의 정치구조와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기여한 대표적인 네 가문이 있다. 5-6세기 百年에 걸쳐 정치실력자인 소가(蘇我), 百濟人 이직기의 후손인 야마토노 아야(東漢), 王仁博士의 후손인 가와치노 아야(西漢), 그리고 하타(秦)의 네 씨족이다. 이 중 蘇我는 5-6세기에 걸쳐 백여 년 동안 야마토조정시대에 막강한 권력가문으로 聖德太子도 이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야마토노 아야와 가와치노 후미가문의 후손들은 지식 수준이 높아 당시 조정에서 외교, 군사부문과 문필 밑 고급기술 분야에 종사했다. 이 가운데서도 주로 산업분야에 집중한 하타씨족이 日本歷史에 가장 넓고 깊게 기여했으며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 日本 전역에 남아있다. 하타씨족이 치수사업에 성공한 가쓰라강는 京都市 서쪽을 관통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다 大阪市와의 경계선에서 우지강(宇治川) 과 기즈강(木津川)을 만나 오사카시내를 지나가는 요도강(淀川)에 합류, 오사카만으로 흘러든다. 요도강도 京都의 가쓰라강과 마찬가지로 홍수가 잦아 주변에 사람이 살 수 없었으나 6세기 초 하타씨족이 수십년에 걸친 사투 끝에 요도강 제방축조에 성공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고 광활한 경지가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유역면적이 8,300 제곱km에 이르는 가쓰라강과 요도강 일대에는 오늘 날 1,100만 여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가쓰라강과 요도강은 大阪府를 비롯하여 京都府, 滋賀県, 兵庫県, 三重県, 그리고 나라현 등 6개 府, 県에 걸쳐 흐른다. 하타씨족이 이 두 강의 치수공사에 성공함으로써 홍수피해를 면하게 된 京都는 천년 동안 日本의 도읍으로 이어져 왔으며 大阪을 중심으로 하는 一帶도 日本最大의 상업도시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終>
2026-07-05, 權泰鳴 作成, 서울商大58會 傳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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