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7월22일 [權泰鳴칼럼] 北間島 抗日獨立運動 遺蹟地를 돌아보고(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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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장시 작성일26-07-22 19:50 조회2회 댓글0건본문
2026년7월22일[權泰鳴칼럼]北間島 抗日獨立運動 遺蹟地를 돌아보고(1/4)
安重根(1879~1910)의사의 육혈포가 ‘이또히로부미’(伊藤博文)의 심장을 정조준하여 불을 뿜어냈던 Harbin驛頭. 救國의 총성메아리가 아직도 귓전을 울리는 듯한 驛舍앞 넓은 광장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짙은 회색의 驛舍 벽에는 온갖 광고물과 플래카드가 어지럽게 걸려있었다. 1909년10월26일오전9시30분. 伊藤博文은 코콥초프(Kokovtsov) Russia재무장관과 열차안 회담을 마친후 사열을 받기 위해 잠깐 下車했다. 애국지사 安重根은 사열을 끝내고 열차로 돌아가는 伊藤을 향해 침착하게 다가갔다. 순간 불을 뿜은 그의 브라운 반 자동권총 M1900의 탄알은 정확하게 伊藤의 심장에 박혔다. 伊藤은 고목처럼 넘어졌고 安重根은 그 자리에서 “大韓萬歲’를 세 번 외쳤다.



(Russia 재무장관 Kokovtsov)
오늘날, 600여만명의人口를 안고 있는Harbin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수도다. ‘어망건조장’이란 뜻을 가진Harbin은黑龍江省의省都이자中國에서10번째의 큰 도시이다.松花江바로 남쪽에 위치한Harbin일대에는 기원전2,200여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오래전 안수길(安壽吉, 1911~1977)의小說‘北間島’를 읽고 언젠가 한번은 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거리가 먼곳이 아닌데도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다.지금의延吉을 중심으로 항일독립유적과 민족교육의 요람이었던龍井을 중심으로 한北間島일원은19세기 들어 특히 우리민족에게는 애환이 깊게 서려있는 곳이다.그래서일까 이번 여행은 마치 탯줄 끊은 고향을 인생 마지막에 찾은 듯한 진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여기에 옛高句麗의都邑이었던集安을 중심으로 한高句麗유적까지 돌아볼 기회가 추가돼 여행의 의미가 더해졌다.

(安重根紀念館 in Harbin)
朝鮮朝말엽 세도정치에 휘둘린朝廷의 무능을 틈탄中央과地方官員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린 백성들이男負女戴의 행장으로半島의 북쪽 국경을 넘어中國땅으로 피난길에 오른 게1860년부터였다.이 가난의 도피행렬은1885년 당시淸나라의朝鮮人滿洲移住禁止令의 철폐로 더욱 길게 이어졌으며 특히20세기에 들어서는朝鮮을 침략한日帝의 압정에 항거하는獨立運動家들까지 합해져移住者가 급증하게 됐다.安壽吉의小說 北間島는1870년부터解放까지의 격동기에 한 가정이 겪은移民受難史를 농밀하게 그리고 있다.이小說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숨이 차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새롭게 떠 올랐다.땅에 대한 애착과 강한民族精神의 소유자인移民1세 이한복은 감시가 삼엄한豆滿江을 건너가 죽음을 각오하고 토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어느 날 밤淸國人밭에서 감자를 캐다 붙잡혀淸國人모양의 머리를 하고 돌아온 손자의 변발을 자르다가 분을 삭이지 못한 이한복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그 뒤 그의 후손들은 갖은 수난과 고통을 겪으며 어려운 삶을 질기게 이어오다4대째 이르러解放을 맞게 된다.이들이 핍박 속에 맨손으로荒蕪地를 개척하면서 질경이처럼 질기게 살아 온 그 땅이 지금延吉市를 중심으로 한延邊朝鮮族自治州가 되었다. ‘間島’는 압록강과 두만강 북편에 걸친 일원으로朝鮮族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다.北間島는1712년朝鮮과淸國간에 맺어진 조약에 의해朝鮮領土에 편입됐으나1882년高宗19년淸國이 갑자기 영토권을 주장하면서朝鮮族居住民의 이주를 강요해 와1905년 을사늑약 체결4년 뒤인1909년北間島를中國에 넘겨버리고 말았다.北間島일대는 본래夫餘와北沃沮그리고高句麗와渤海의 영역이었다.

仁川空港이륙 후 한동안 서쪽으로 날던 비행기가山東半島앞에서 기수를 북쪽으로 틀었다.遼東半島南端 大連港의 거대한 공업지대를 벗어나자 오른쪽으로遼東半島의 험준한 산맥이,그리고 왼편으론 동북평원이 북쪽으로 끝없이 넓게 펼쳐졌다.남쪽의瀋陽을 중심으로 한遼河평원에서 시작되는 동북평원은美國이나 캐나다의中西部大平原을 연상케 할 정도로 광활한 곡창지대였다.가을걷이가 거의 끝난10월 하순의 계절이라 검누른 들판이 일망무제로 펼쳐졌다.고도가 낮아지면서40-50호 규모로 이루어진 농촌마을들이 점차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그런데 집집마다 마당이 노란색이었다.뭔가 했더니 껍질을 벗긴 옥수수 더미라고 옆자리의中國人이 일러주었다.黑龍江省과吉林省의 평원은 대부분이 옥수수밭이다.아직도 사람 손이 남아도는 나라라 그런지 그 넓은 들판에 농기계가 눈에 띄지 않았다.中國의 농촌은 아직 품앗이 방식이 주종이었다.

비행기가Harbin에 가까워지자 북쪽 평원을 굽이쳐 흘러가는松花江의 물줄기 위로 늦가을 햇살이 하얗게 반사됐다.입국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한 주간 동안 안내해줄K씨가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다. 10월인데도Harbin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있었다.두어 시간 사이에 가을이 겨울로 급변해 추위가 더 심하게 느껴졌다.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시내 몇 곳을 돌자 어느새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Harbin夜市場에 볼거리가 많다 해서 저녁도 먹을 겸 찾아갔다.시내 중심지인데도 재래시장 안 길은 비포장 길이었다.좁은 시장길이 사람들로 꽉 차 뚫고 나가기가 힘들 정도였다.시장 안 골목에 있는 한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갔다.칼국수를 주문하자 자기 집에서는 만들지 않지만 가능하다고 해 조금 기다리자 옆집에서 가져왔다.그러니까 내가 주문한 음식을 옆 집에서 만들어 온 것이었다.남의 집 음식을 팔아주면 당신은 남는 게 없지 않으냐고 했더니 서로가 그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손해날 게 없다고 했다.한 집에 앉아서 이집저집 음식을 골라서 맛볼 수 있으니 손님은 편하고 음식점도 손해볼게 없는 중국사람들의 지혜로운協業商術이었다.

(731部隊 石井四郞 部隊長)
도착 다음 날 아침 일찍Harbin교외에 위치한 악명높은731部隊를 찾아갔다. 731部隊는軍國日本陸軍이1931년滿洲를 점령한 바로 뒤인1933년에 설치하여1945년까지12년 동안 살아있는 사람을 상대로 온갖 잔혹한 실험을 수행했던 만행의 현장이다.정식명칭은關東軍防疫給水本部였다. Harbin시에서 남쪽으로24km떨어진 평방구에 있는 부대로 택시를 몰았다. Auschwitz强制收容所를 닮은 빛바랜 우중충한 황색의2층 건물이었다.시간이 너무 일러 문이 잠겨있었다.경비원을 불러 사정을 설명했으나9시에 문을 연다며 입장이 안 된다고 해 할 수 없이 밖에서 건물을 촬영하고 안쪽 벽에 부착돼있는 건물설명서는 경비원에게 카메라를 주어 한 컷 담은 후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그런데 택시기사가 연신 고맙다며 즐거운 표정이었다.동행한K씨 말이 하루會社納入金을 다 채우게 돼 앞으로 버는 것은 모두 자기수입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어떤 사람은 그 부대에 끌려가 생명을 잃고 어떤 사람은 그곳을 잠깐 다녀와 돈을 벌었다고 좋아하니 이런 게 사람이 타고난 운일까 싶었다.
731部隊창설후生体실험으로 사망한 사람이3000여명에 이르고 그 가운데95%가中國人과韓國人인 것으로 밝혀졌다.사망자가3천명이란 사실은731部隊의 벽에 부착된說明板에도 분명하게 기록돼있다. 731部隊는 본래 지하감옥이 딸린 건물을 비롯하여150채가 넘는 실험실건물이6제곱km의 넓은 대지에 꽉차있었으나1945년太平洋戰爭에 패한日本軍이 퇴거하면서 대부분의 건물과 중요시설 및 증거자료를 파괴하고 불태워버렸으며 일부 중요자료는部隊長‘이시이시로’(石井四郞)이日本으로 가져갔다.그런데戰後 石井 部隊長을 비롯한 간부들은 생체실험자료를美國에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대부분 면책됐으며731部隊관계자 중에는東京戰犯裁判에 한 사람도 기소되지 않았다.더욱이 당시731部隊幹部들은 그 후 대부분學界나醫療界또는實業界로 진출했으며,한 사람은,日本最大血液銀行인綠十字를 설립했는데,이 회사는 뒤에 미쓰비시(三菱)製藥會社에 합병되었다.<계속>2015-10-01權泰鳴 作成, 2026-07-22서울商大58會 傳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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