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7월22일 [權泰鳴칼럼] 北間島 抗日獨立運動 遺蹟地를 돌아보고(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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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장시 작성일26-07-22 22:27 조회3회 댓글0건본문
2026년7월22일[權泰鳴칼럼]北間島 抗日獨立運動 遺蹟地를 돌아보고(2/4)

731部隊의生体실험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 많은 잔학한 방법으로 행해졌다.마취를 하지 않은生体해부와 체내 세균주입,각종 장기적출,유혈 정도의 측정을 위한 사지절단,인체의 부패 정도를 측정하기 위한 살아있는 사람의 반복적인 냉동과 해동,위를 제거한 후 식도와 장의 직접연결,질식사의 시간측정을 위한 거꾸로 메어달기,굶긴후 사망까지의 시간측정,동물의 피를 인체에 주입후 상태파악,다량의 방사선을 쪼인후 사망시간확인,바닷물주입으로 인한 신체반응측정,진공상태에서의 사망시간측정 등,이루 말할 수 없는 잔학한 방법으로 남녀노소에서 유아까지 가리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이면 모두 실험의 대상으로 삼았다.生体실험으로 사망한 수는Auschwitz에 비교되지 않지만人類歷史上가장 잔학무도한 인간파괴의 악행으로 기록되고 있다.당시731部隊의 간부였던Yuasa Ken(湯淺謙)이란 의사는2007년英字新聞인Japan Times에 실은 기고에서“生体실험이 처음엔 두려웠으나 두 번째는 한결 쉬워졌으며 세 번째부터는 가벼운 기분으로 임했다.생체실험엔1000명 이상의 의사들이 참여했다”고 밝혔다.日本의生体실험장은Harbin외에도中國內다른 곳8개소와Singapore에1개소가 더 있었다. 2002년 열린 세균범죄에 관한國際Symposium은日本軍의 세균 및生体실험에 의한 사망자가 모두58만 명에 이른 것으로 확인했다.

이른 아침부터 유쾌하지 않은 마음으로Harbin을 벗어나 남쪽의長春으로 내려갔다.長春까지는230여km로 먼 거리지만 버스시간이 맞지 않아 택시를 이용했다. 100여km쯤 갔을 때檢問所에서 택시기사와 검문경찰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영업이 불가능한 다른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벌금을 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20여분이나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동안 손님은 안중에도 없었다.그러다가 사무실로 들어가더니技士가 금방 싱글벙글하며 나왔다.함께 간K씨 말이 경찰과技士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그리고 잠시 후 경찰이長春에서Harbin으로 올라가는 택시를 세워 손님을 내리게 하고 그 택시에 우리를,그리고 우리가 탔던 차에는長春승객을 바꿔 태우고 각각 왔던 길로 되돌아가게 했다.檢問所까지의 요금은 각각 그 곳까지 이용한 택시기사에게 지불했다.中國에는 영업지역이 바뀌어 문제가 발생할 경우 경찰의 주선으로 승객을 바꿔 태워 해결하는 경우가 흔한 일이라고K씨가 일러주었다.

(舊關東軍司領部跡)

(現在 關東軍司令部跡)
오후2시 남짓해長春에 도착했다.약속시간 보다 한 시간 늦어K씨의知人두 사람이 차를 갖고 왔다.當日 鴨綠江변에 있는集安까지 가야하기 때문에長春驛앞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마치고 서둘러 남쪽으로 내달았다.中國의 디트로이트라고 불리는長春은軍國日本의滿洲侵略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1931년日本關東軍이 날조한柳條湖事件을 트집잡아日本이滿洲를占領하고 세운 괴뢰정부滿洲國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기거했던 황궁을 비롯하여日本國會議事堂을 본 떠 지었다는滿洲國 國務院건물과 악명 높은日本關東軍司令部의 중후한 건물 등은 지금도 주위를 위압하는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이 건물들은 현재 모두 박물관이나 병원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360만 명 가까운 인구를 안고 있는吉林省의省都인長春은 자동차공업 외에도吉林大學을 비롯한 많은 대학이 몰려있는 교육도시이자 중국영화산업과 식품공업의 중심지이다.長春은4계절의 구분이 분명하다 해서‘北國春城’으로 불리기도 한다.동북중국 일대의 벼농사는長春을 경계로 남쪽으로만 가능하고 그 위로는 옥수수만 재배된다.
長春에서集安까지는 약300km의 거리였다.시원하게 뚫린4차선高速道路엔 통행차량이 뜸했다.長春에서 남쪽의集安방향으로 약200km거리인白山까지는4차선高速道路가 거의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어있고白山에서通化까지20여km는高速道路는 아니어도 길이 꽤 넓었으나通化에서集安으로 이어지는 길은 굴곡이 심한데다 험한 산길이어서 차가 속력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高速道路에서 제한속도인 시속100km를 훌쩍 넘어150km이상으로 달려 과속단속에 걸리지 않을까 염려됐으나 공무원은 괜찮다고K씨가 일러주었다.차를 갖고 온 두 사람 모두吉林省공무원으로 한 사람은朝鮮族이고 다른 한 사람은中國人이었다.밤9시가 되어서야集安에 도착했다. Harbin을 출발한 지12시간 뒤였다.集安에서 가장 좋다는 별세개짜리 호텔에 들었으나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12시간 지친 몸에 따듯한 물 한 바가지 끼얹지도 못한 채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바로 앞으로 압록강이 흘러가는集安은23만명의人口를 안고 있는 지방 중소도시이다.북쪽에서集安으로 가는 육로는通化를 거치는 도로 한 가닥과鐵道뿐이다.철도노선은白頭山바로 북쪽 이도백하(二道白河)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가다가通化앞에서 남쪽으로 꺾어北韓의江界까지 이어지는 선이었다.通化와集安사이엔 남서방향으로 뻗은 해발1000여m높이의 백화산맥이集安으로서는 외적침략을 막아주는 천혜의 자연방패였다.集安에서2km남쪽이北韓이었다.
集安은高句麗의 두 번째 도읍이다. 2대 유리왕은 재위22년째인 서기3년 도읍을卒本에서集安으로 옮긴 뒤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구축하고 나라의 기반을 다졌다.集安시내 한 가운데에 있는高句麗의 옛國內城궁터에 아담한 공원이 조성돼있었다.공원 바로 옆에 기둥을 세워 지붕만 얹은50평 크기의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마침 지나가던 할머니에게 물었더니高句麗時代백성이 살았던 한국식 온돌 집의 유적이라며 서툴긴 했으나 우리말도 몇 마디씩 섞어가면서 설명해주었다.


集安일대는 시내는 물론 주변이 온통高句麗유적으로 덮여있다.피라미드를 연상케 하는20대長壽王의 능묘인 장군총,국내성을 둘러쌌던 성벽,그리고廣開土大王碑및 태왕릉과 산성하고분군 등高句麗유적이 사방에 널려있다.현재 확인된集安市일원의高句麗분묘는32개 지역에 무려12,000여 기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환도산성 아래 넓은 평지에서 확인된 고분만도1,582개에 이르며 산성하 고분군에는 귀족들의 분묘인 수십 기의 대형 계단식 방단적석묘가 남아있다.이 중에서도1298호인 꺾인 천장묘와635호의 형무덤과636호의 아우무덤, 1304호의 거북등무덤, 983호의 연꽃무덤,그리고332호의 왕자무덤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산성하고분군은5세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한 변이20m가 넘는 것도 있다.集安市중심지역 아파트 단지 한 가운데에 남아있는300여m에 이르는 옛 국내성 돌담은 대부분 긴 세월에 허물어져 가장 높은 곳이 겨우2m정도이며 잡초로 덮여있지만 옛 왕도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지금은 성벽주위에 철책을 세우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集安市의 가장 대표적인高句麗유적은廣開土大王碑와將軍塚으로 불리는長壽王의 능묘이다.사방을 두꺼운 유리로 싼 중국식 누각 안에 보존돼있는廣開土大王碑는 내부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경비원 한 사람이 누각 안에 상주하고 있었다.특별허가를 받아 유리누각 안으로 들어갔으나 공간이 너무 좁아 비석의 전신촬영이 무척 어려웠다. 414년에 아들인長壽王이 건립한廣開土大王碑는 높이가6.39m에 측면이1,35m-1,46m에 이르는 거대한 응회암비석으로 본래 예서체로 음각된 비문이1,775자였으나 현재142자는 판독불능이다.비석은高句麗建國에서廣開土大王에 이르기까지의歷史와廣開土大王의 전쟁기록,그리고 능비의 건립과 묘지기인 수묘인에 관한 기록 등을 담고 있다.碑文내용에 관해서는韓國과日本學者들간에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日本側이碑文을 일부 깎아 자기네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碑石바로 옆에 있는廣開土大王陵은 긴 세월 풍상에 봉분의 높이가 많이 낮아졌다. <계속>
2015-10-01權泰鳴 作成, 2026-07-22서울商大58會 傳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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